노망과 광기 - 신봉승 희곡집
피리어드와 방점, 그리고 순수의 추억
관점의 문제에 있어 사람들의 태도는 상당히 자기모순적이다.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면 애써 외면하거나 무책임하다. 그것은 사회학적인 문제나 철학적인 문제와는 달라서 자유로운 선택을 위한 간편한 장치를 사회와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 놓고 방관하면서 즐기고 있다.
작금의 사극, 역사와는 무관하나 일말의 사실만을 근거와 진실과 역사를 호도하는 일이 마치 역사의 부분인 양, 차용의 문제는 과감하나 책임은 완벽하게 회피하는, 그야말로 시청률 제일주의 현혹에 함몰되어 도무지 그 앞뒤가 없는 정체불명의 드라마와 역사인식이 횡행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지식인들은 겪고 있다. 난감한 일이기는 하나, 거기에 ‘딴지’를 거는 순간 트위터 혹은 혀 짧은 ‘폐인’들의 무차별 폭격을 감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모든 외부적인 조건들을 감내하고서도 문학과 역사에 대한 순혈주의가 아직도 창궐하고, 아무리 그 순수의 영역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역기능에 대한 순기능의 사명으로 점차적인 역사인식에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한 지식인의 노력은 마땅히 평가받을 만한 가치마저 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사의 대중화’라는 책임 하에, 그 성과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최소한의 역사인식과 사실을 근거로 조금씩이나마 대중에게 접근함으로써 역사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눈 밝은 길라잡이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평가받을 만한 부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이 방송 시작 전에 역사적인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친절한 설명을 자막으로 아무리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거기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역사의 부분으로 인식하는 몰이해를 등가하여 편안하게 몰입하여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신봉승 희곡집 <노망과 광기>는 이러한 안이한 현실판단과 이해에 있어 작은 명제를 던진다. 노회한 인기 방송작가의 뒷풀이가 아니라 개인의 판단과 성찰에 따른 부단한 기록의 일부이자 한 개인의 도달할 수 있는 역사탐방의 소중한 결실의 성과물이다. 누구보다도 드라마의 현실과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당사자로서 작금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제기이자 통렬한 반성이기도 하다. 하물며 국사(國史)가 사라진 교육 현장이나 세계화의 미명 하에 나날이 퇴조하는 젊은 세대들의 역사인식과 물신화(物神化)의 세태에 고하는 학자적 양심의 고뇌에 찬 결실에 다름이 아니라면 이번 성과물은 가히 작은 반석 하나를 고즈넉하게 깔아놓는 셈이다. 더불어 ‘온고지신’과 ‘법고창신’이 전가의 보도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조용히 웅변하는 소중한 외침이다.
태생적 예술적 표현방법에 있어서의 방법적 차용은 이미 예술적인 상황에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전혀 발걸음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역사적 인식, 문헌과 기록을 통한 탐구에 의한 정확한 팩트에의 역사인식은 오히려 희극의 긴장감과 역사적 상상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방법적 차용의 기술의 현학적인 테크닉을 뛰어넘음은 물론 오히려 그런 범주를 뛰어넘은 개인의 온전한 학문적 노력의 산물이다. 드라마가 가진 원천적인 숙명인 시청률 위주의 그 지난한 한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접근에의 시도, 쉬운 언어로 중심에 다가가는 노력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할 법도 하다.
역사의 자가발전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역사적인 접근 방식, 근본적인 이해는 그 깊이만큼 소중한 동기이다. 우국적인 메시지나 비분강개한 질풍의 인식들이 눈에 거슬리는 점도 없지는 않으나 돌아보면 그것이 우리의 숙명적인 현실이었고, 그것이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한 원동력이었음도 딱히 부정할 수가 없다. 선각자는 돈키호테가 될 수도 있고, 지사의 전형으로 죽음을 무릅쓸 수도 있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오늘의 우리 현실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정사와 야사가 공존하듯 문헌과 소문으로도 역사는 유지되는 법이다. 명의와 돌팔이의 비교라면 극한적이겠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그 결과는 당사자들의 몫이다. 때문에 신봉승의 희곡집 <노망과 광기>가 가지는 의미는 그 시작의 소소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부분 대중들의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 시도하지 않아도 될 모험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경지에서도 스스로 회초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 순순한 문학적 열정의 고갱이는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이다. 다만 시간의 의미를 더욱 깊이 갈마하여 대중의 인식과 역사적 인식이 오롯하게 공존하는 그의 혜안이 결실을 맺는 그런 아름다운 공간이 탄생하길 바라는 그 시발점이 이 <노망과 광기>의 의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머리말에 ‘내 문학의 피리어드를 찍더라도’라는 말로 그 시작의 어려움과 각오를 정중하게 알리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피리어드보다는 방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를 일이다. 결단의 고뇌가 아프게 느껴지는 결심의 언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노 작가의 새로운 시작의 결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순결한 작업임을 확인하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다.
한 사람의 올곧은 시작의 웅변이 다만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