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기행
네 번째 창작 단편집을 내놓으며 새삼 쑥스럽기도 하고 좀 허전하기도 하다.(작품집을 출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동안의 나의 수확이 이것 뿐이었구나 하는 자책, 그리고 소설작품을 읽는 독자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오늘날 눈부신 산업사회의 물질만능시대에 과연 소설이 얼마만큼 존립할 수 있는지? 소설의 종식을 우려한 목소리는 아마도 영화가 등장하고서부터였다고 한다. 하물며 집집마다 작은 영화관이라고 할 수 있는 TV가 있고,PC까지 갖추고 있는 요즘이야 어찌 하랴. 소설의 운명이 목전에까지 닿는 듯한 위기의식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지망도 많고 작가들은 끊임없이 작품을 내놓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는다."라는 명언처럼. 그렇다. 아무리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포화상태에 이르고 그 파도가 소설을 위협하여 한 편의 소설이 휴지조각처럼 보일지언정 소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 인간은 정신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창작소설 역시 정신적 소산이다.
올바른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독자가 있는 한, 건전한 작가 또한 계속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에 절망하고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작가 또한 계속 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에 절망하고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작가는 소설이 라는 창작으로 현실의 어려움의 돌파구를 마련해 주고, 또 다른 세계를 제시해 주며 정신적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그런 역할을 해준다면, 그저 작가는 행복할 따름이다. 작가가 창작활동을 하는 것은 무상의 행위이지만, 또한 그만둘 수 없는 시지프스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