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해조는 소설의 중심을 재미와 교화로 봄으로써 소설의 오락성을 중시하였고 자신이 비판하였던 고전 소설들을 각색하여 시대에 맞게 각색하였다. 애국 계몽적인 언론인 겸 작가로 출발하여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변모하면서 오락성을 추구하면서 애국적인 사상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현고직이가 다년 선혜청고직이로 있었으니 영악스럽든가 꾀가 있는 자 같으면 장안에서 몇째 아니 가는 부자가 되려면 누운 소 타기와 같이 힘이 반점도 아니 들었을 것인데, 이 사람은 소홀하기가 한 바리에 실을 짝이 없어서 생기는대로 장래 생각은 꿈에도 없이 지내다가, 선혜청이 혁파(革罷)된 뒤에 끈 떨어진 뒤웅이가 되어 집과 세간을 깡그리 팔아먹고 남의 집 곁방에 가 들었는데, 그 중에 제 버릇은 개 못주어 여전히 소홀히 지내다가 선산 위토(位土) 마지기까지도 약삭빠른 일가놈에게 다 홀치어서 남과 같이 시골로도 못 가고 폐포파립(弊袍破笠)에 삼순구식(三旬九食)으로 굶기를 밥먹듯 하더니, 마침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지내던 벗을 만나 막걸리 사발이나 얻어먹고 얼지근하여 집구석이라구 돌아오니, 마누라가 모밀 나깨로 죽을 쑤어다 놓고 어린 딸과 마주앉아 그 장한 것을 용미봉탕(龍尾鳳湯)이나 지지 않게 여기어 서로 아니 먹고 자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라. 그 광경을 보니 가슴에서 함박 같은 불덩이가 상투 끝까지 불끈불끈 치밀지마는 불쌍한 가속의 마음을 상할까 두려워서 주정 한 마디 못하고 치밀던 불을 그 가슴에다 되서려 담아 숯 검정이가 되면서 껄껄 웃고 들여다보며,『이애 금선아, 그게 저녁이냐? 나는 어디서 무엇을 잔뜩 먹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호는 열재, 이열재, 동농. 필명으로 선음자, 하관생, 석춘자, 신안생, 해관자, 우산거사. 어릴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9세에는 초시에 합격했으며, 25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를 주관했다. 『대국신문』,『황성신문』,『매일신문』에 근무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기호흥학회평의원, 『기호흥학회월보』편집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양기탁, 주시경, 이준, 노익형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7년 5월 11일 포천에서 병사했다.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사창동 뒤 낙춘군묘 동쪽에 묘소가 있다. 미완의 한문소설 「잠상태」를 쓴 이후 신소설 창작을 시작하여, 「강명화실기」에 이르기까지 4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정치적 성향의 풍자 양식인 「자유종」, 동학 봉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 「화의혈」, 미신타파의 계몽성을 드러내는 「구마검」, 추리적 요소를 지닌 「구의산」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적 계몽적 성향으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해조는 이인직과 최찬식의 중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원앙도」,「빈상설」,「홍도화」,「화세계」,「월하가인」,「모란병」,「소양정」,「쌍옥적」,「춘외춘」,「만월대」,「탄금대」,「홍장군전」등의 작품이 있다. 한편, 명창 박기홍, 심정순, 곽창기 등의 구술을 산정하여 판소리계 소설들을 새로이 개작하기도 했는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등을 개작한「옥중화」,「강상련」,「토의간」,「연의각」등이 그것이다. 『정선조선가곡』도 주목할 만 하다. 『철세계』, 『화성돈전』등의 역서를 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