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해조는 소설의 중심을 재미와 교화로 봄으로써 소설의 오락성을 중시하였고 자신이 비판하였던 고전 소설들을 각색하여 시대에 맞게 각색하였다. 애국 계몽적인 언론인 겸 작가로 출발하여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변모하면서 오락성을 추구하면서 애국적인 사상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배오개 네거리에서 동소문 편으로 통한 큰 길은 통안 병문이라. 그 길로 올라가는 전차에 사람이 어떻게 많이 오르는지 정거수가 미처 차표 값을 다 받지 못할 지경인데, 사람이 차에만 그렇게 많이 오른 것이 아니라 거리 가는 남녀노소가 넓은 길에 빽빽하도록 찼으니, 이는 그 길이 특별히 번창하여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날이 일요일인 고로 일반 관민들이 골몰 무가히 지내다가 하루 한가한 겨를을 얻어 창덕궁 안 동물원ㆍ박물원ㆍ식물원을 구경하려고 가는 사람들이라.
이왕 정시나절일 제 뵈일 때 팔도 선비가 장중에 들어가느라고 집춘문이나 월근문에 부문하는 일체로 그 많은 구경군이 홍화문 앞에 와서 낱낱이 표 한 장씩을 사서 들고 문안으로 들어가더니 넓으나 넓은 곳에 각기 마음대로 이리로 떼를 지어 간다. 그 중에 어떠한 처녀 하나이 나이는 십일 세가 겨우 됨직 하고 이목구비가 떡으로 빚고 붓으로 그린 듯한데, 삼단 같은 머리를 발뒤꿈치까지 치렁치렁하게 땋아 느리었는데, 고운 모시 진솔 치마를 과히 상스럽지 않게 남의 눈에 거치지 않을만치 머리에다 쓰고 근 오십된 노파의 뒤를 따라가며 나직한 음성으로,
에그 할머니, 사람도 퍽으나 많습니다.
글세, 난 이런 줄은 몰랐구나.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호는 열재, 이열재, 동농. 필명으로 선음자, 하관생, 석춘자, 신안생, 해관자, 우산거사. 어릴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9세에는 초시에 합격했으며, 25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를 주관했다. 『대국신문』,『황성신문』,『매일신문』에 근무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기호흥학회평의원, 『기호흥학회월보』편집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양기탁, 주시경, 이준, 노익형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7년 5월 11일 포천에서 병사했다.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사창동 뒤 낙춘군묘 동쪽에 묘소가 있다. 미완의 한문소설 「잠상태」를 쓴 이후 신소설 창작을 시작하여, 「강명화실기」에 이르기까지 40여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정치적 성향의 풍자 양식인 「자유종」, 동학 봉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 「화의혈」, 미신타파의 계몽성을 드러내는 「구마검」, 추리적 요소를 지닌 「구의산」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적 계몽적 성향으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해조는 이인직과 최찬식의 중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원앙도」,「빈상설」,「홍도화」,「화세계」,「월하가인」,「모란병」,「소양정」,「쌍옥적」,「춘외춘」,「만월대」,「탄금대」,「홍장군전」등의 작품이 있다. 한편, 명창 박기홍, 심정순, 곽창기 등의 구술을 산정하여 판소리계 소설들을 새로이 개작하기도 했는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등을 개작한「옥중화」,「강상련」,「토의간」,「연의각」등이 그것이다. 『정선조선가곡』도 주목할 만 하다. 『철세계』, 『화성돈전』등의 역서를 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