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이런 ‘옛날이야기’라면 하염없이 읽고 싶다.” _장일호(《시사IN》 기자, 《슬픔의 방문》 저자)
“무엇보다 이 책은 재밌다. 역사와 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앎의 의지를 자극한다.” _김만권(정치철학자, 《외로움의 습격》 저자)
리샹란과 최승희, 히틀러와 손기정, 안창호와 파농,
잭 런던과 윤치호, 나혜석과 아인슈타인…
19세기 말~20세기 중반, 대륙을 넘어 연결된 인물들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남겨진 가파른 마음들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세상이 서로 깊이 연루된 시기”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틀 지은 가장 가까운 과거”인 19세기 말~20세기 중반 식민제국주의 시기를 주 배경으로 하는 이 책은 대륙을 넘어 상호작용하는 동시대 인물들의 연결을 횡으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당대의 사고 체계나 인식, 감수성 등의 유산을 종으로 횡단하는 교양 역사서다. 파리코뮌, 러일전쟁, 의화단운동, 제1차 세계대전, 3‧1운동, 제1차 상하이사변, 베를린 올림픽,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정치인과 군인, 연예인과 작가, 과학자와 지식인, 성을 파는 여성과 여성운동가, 독립운동가와 밀정, 평범한 생활인 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향유한 소설과 영화, 노래도 다수 인용된다. 그 모든 것들이 “역사에 휘말리고 역사를 만들다가 이윽고 역사가 되는”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2023년 5월부터 2024년 8월까지 《시사IN》에서 <조형근의 ‘역사의 뒤 페이지’>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글 가운데 18편을 고르고 보완해 엮은 책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보다 개개인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복각해내는 것에 집중하는 이 책에는 순전한 악마나 가엾은 희생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고 실수하고 꿈꾸고 욕망하는 인물들의 입체적인 모습과 이들이 서로 스치고 얽히며 펼쳐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때로 숭고하기도 비열하기도 한 선택들과, 이 선택들이 불러오는 또 다른 사건의 연쇄는 국가와 민족, 선과 악, 승리와 패배, 피해와 가해 등 기존의 역사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만들고 바꾸어간다.
제목에 활용된 ‘콰이강의 다리’ 또한 이렇듯 경계를 넘어선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동남아시아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은 버마(미얀마)를 넘어 인도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를 위해 태국-버마 철도 건설을 결정하고, 연합군 포로와 현지 민간인을 강제 동원했다. 험지에서의 난공사에 수만 명이 죽어갔다. 그 ‘죽음의 철도’에 1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강제 징용되어 포로감시원 노릇을 한 이들은 일본군에게 맞고 포로들을 학대하며 현장을 이끌었다. 어느 영국군 포로에겐 가장 끔찍한 가해자의 모습이 조선인의 얼굴이기도 한 것이다. 전후, 이들은 전범 재판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그곳에 징용되어 갔다는 사실, 그들의 일본인 상관 다수는 재판을 받기는커녕 그대로 풀려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없이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명령에 따라 저지른 폭력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대받은 포로들을 찾아가 사죄하는 동시에, 일본 정부에는 책임을 물었다. 당한 폭력에 분개하며 행한 폭력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려 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중첩된 운명의 당사자가 된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신분을 숨기고 일제 괴뢰 만주국의 스타가 된 인물이자 전후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 개입한 일본의 평화운동가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 질소비료 개발로 식량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염소가스 제조법을 발명하며 대량학살의 시대를 불러온 유대인 프리츠 하버, 약육강식의 질서를 내면화한 인물이자 세간의 비난 속에서 ‘이혼녀’ 나혜석과 박인덕을 공개 변호한 계몽 지식인 윤치호, 서구 남성의 동양 여성 판타지에 일조한 할리우드 스타이자 나치에 맞선 독일인 마를레네 디트리히, 아프리카 원주민의 사라져가는 삶을 사명을 다해 기록한 나치 연루자 레니 리펜슈탈, ‘전후 독일의 양심’이 된 나치 친위대원 귄터 그라스 등 국가나 민족, 선과 악, 피해와 가해의 논리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인간의 다종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거대한 역사의 힘도, 격랑의 사건들도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이 책은 인간의 이야기로 썼다. 다수의 인물들이 역사에 휘말리고 역사를 만들다가 이윽고 역사가 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고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이들을 순전한 악마나 가엾은 희생자로 그리지 않으려 애썼다.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그들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을 함께 보려 했다.(<서문>에서)
무정과 동정을 넘어
‘연루된 주체’로서 읽는 공동의 역사
제국주의 시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줄곧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피해와 가해의 사실이 명확히 분별된다고 여기고, 과거사는 책임보다 요구와 관계된 문제로 이해한다. 피해 사실을 인정받아 적절한 배‧보상을 이루어내는 것이 이 시기를 건너오는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이 책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문제의 모든 것으로 보는 익숙한 관점을 넘어 그러한 폭력을 가능하게 한 당대의 사고 체계, 인식, 감수성의 구조를 이해하고 성찰의 계기로 삼을 때만 이 시기와의 진정한 단절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9장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까?’는 ‘과학’을 ‘힘’으로 해석하는 소설 《무정》의 마지막 장면과 《무정》의 작가 이광수의 나치즘‧파시즘에 관한 관심, 황우석 붐과 초전도체 논란, 인류를 식량 위기에서 구한 노벨화학상 수상 과학자이자 염소가스 개발로 화학전과 대량학살의 시대를 연 유대인 프리츠 하버의 일생 등을 포개어 살피며, 과학을 오직 힘과 경쟁력으로 환원해온 역사 속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식민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일본 조계지 상하이에서 꽃핀 동양 여성에 대한 서구 남성의 환상과 이에 부응하는 각종 문화상품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감수성이 일본에서는 미군 상대 직업여성 ‘팡팡걸’로, 남한에서는 양공주 ‘에레나’로, 베트남에서는 ‘미스 사이공’으로 이어지며 형성된 성 착취의 역사 또한 이 책 전반에서 거듭 다뤄지는 주제다.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국가에 의해 잊힌 이들에게 ‘과거사 청산’이란 어떤 의미이며, 우리 자신을 이러한 역사로부터 얼마나 타자화할 수 있는지를 현재적 맥락에서 반성적으로 보게 한다.
기억하는 주체로서 우리는 언제나 역사에 연루되어 있음을 환기하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시도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국과 미국이 공적인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을 짚는다. 베트남인 희생자, 부도덕한 전쟁에 끌려가길 거부하며 감옥행을 택했던 사람, 반전운동가 들을 누락하며 참전 군인만을 추모하고 연민하는 선택적 기억과, 베트남전쟁 참전군 추모 행사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향한 이질적인 반응들이 그것이다. 저자는 전쟁을 기억하는 우리의 방식이, 거듭되는 참사에 ‘국가적 애도’를 표하면서도 비극을 야기하는 구조에 대한 성찰은 부재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정(無情)도 동정(同情)도 넘어, 역사가 우리‘에게’ 져야 할 책임만큼이나 우리‘가’ 져야 할 역사적 책임을 철저히 돌아볼 때에만 과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파국의 역사 속에서 돌아보는
섬광 같은 마음과 태도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이 태도를 선택하고 취할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섬세하게 따라가는 이 책은 대문자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다시 새겨볼 만한 섬광 같은 마음의 유산을 빼곡히 소개하는 귀한 기록이기도 하다.
화학전과 대량학살 시대를 연 천재 과학자 프리츠 하버의 손녀는 할아버지가 만든 독가스의 해독제를 개발하는 데 전념하다 연구 예산이 핵폭탄 개발에 우선 투입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숨을 끊는다.(158쪽) 어느 영국인 포로는 콰이강으로 향하는 화물선 안에서 질식의 공포를 느끼며 이송되던 와중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상관 몰래 열차의 문을 열어주었던 순간을 회상한다. 그때 불었던 쾌적한 바람과, 열린 문으로 아무도 탈출하지 않던 일, 감시원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도착 후 얼른 문을 닫아주던 포로들의 모습을 기억했다.(65쪽) 정사(正史)에 남아 회자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 책은 이러한 ‘사소한’ 선택들을 역사의 무대 위에 세우며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해보게 한다. 이념, 국적, 인종 등의 경계를 넘어 ‘보편’을 향했던 작은 선택들을 돌아보고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어쩌면 아주 다른 역사를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