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 - 박형근 장편 소설
제5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대상 수상작
매일 새벽 4시, 세상의 뉴스들이 사라진다!
인터넷 지식 테러리스트들이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 날리는 통쾌한 복수 한 판!
제5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대상 《20세기 소년》이 노블마인에서 출간됐다. 《20세기 소년》은 전아리 《구슬똥을 누는 사나이》, 양지현 《기억은 잠들지 않는다》에 이어 디지털 문학의 계보를 잇는 신인 박형근의 장편 소설이다. ‘21세기는 우릴 배신했어’라며 인터넷 문명을 전복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벽 4시, 세상의 뉴스들이 사라진다
모든 인터넷 지식을 의심하라!
‘탈의실에 몰카 설치한 의사, 경찰에 덜미’같은 기사는 식상하다는 이유로 묻히게 된다. 영영. 앞으로도 이런 진부한 얘기는 메인페이지에서 볼일이 없을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헤드라인을 차지했던 기사들이 이렇게 사라져가곤 한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것들 말이다. 사람들이 식상해하는 보편적인 범죄들.
그렇다고 이 짓이 마냥 지루하기만한 것은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작은 기쁨.
새벽 4시. 단 3분간의 테러.-25쪽
포털에 뉴스를 올리는 아르바이트생인 나(신)는 매일 일어나는 세상의 뉴스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정보를 직접적으로 왜곡하는 것은 아니지만 식상한 뉴스들은 묻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골라 노출하는 것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이런 일상을 견디기 위해 그는 새벽 4시마다 3분 동안 뉴스 링크를 바꿔치기한다. 그럴 때마다 달리는 ‘팬이에요’라는 댓글. 오로지 눈앞의 목적을 좇아 살아가다가 공허해져버린 남자, 호제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사정 후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산다는 건 매일 예쁜 여자를 찾아 하룻밤을 보내도 금세 허탈해져 더 예쁜 여자를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 재미없다’며 나타난 또 다른 기사 바꿔치기의 팬, 발칙한 여중생이자 음란 체벌 카페의 주인인 혜지와 함께 그들은 본격적인 인터넷 지식 뒤집기를 시도한다.
바꿔치기 된 링크를 타고 내가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 ‘20세기소년’으로 모인 이들, 이들의 공식 명칭 또한 ‘20세기소년’이다. 첫 번째 미션은 세상의 얼룩에 관여하기. 아이스크림 얼룩에는 스킨토너 한 방울, 하얀 치약이 튄 바지에는 생감자를 문지르라는 식으로 포털지식 댓글에 거짓 정보를 흘린다. 요가 자세를 검색한 20대 여성은 허리 디스크에 걸리고, 설사 멈추는 법을 알아봤던 버스 기사는 도리어 아픈 배를 참지 못해 사고를 낸다. 사소하게 어그러진 일상 지식에서부터 세상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업데이트의 노예, 뉴스 알바들이 뭉쳤다
자투리 인생들의 통쾌한 복수 한 판!
20세기소년들은 인터넷 지식을 조금씩 바꾸는 것 외에도 여러 방법으로 활약한다. 그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문명을 뼛속 깊숙이 활용한 것들. 온갖 프랜차이즈 쿠폰을 조합해서 가짜 쿠폰을 인터넷 곳곳에 뿌린다. 곧 덩치가 산만한 청년들이 공짜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매장에서 춤을 추고, ‘스텔라’나 ‘크리스’같은 영어 이름을 단 알바생, 매니저가 당황한다.
유명 샴푸 회사에 다니는 토미의 도움을 받아서는 영화 시상식장에서 만난 잘나가는 연예인에게 불우이웃 돕기, 아프리카 어린이 후원 등의 명목으로 플라스틱 팔찌를 끼워주기도 한다. 사실 팔찌는 20세기소년 쇼핑몰의 재고 상품이지만 아무도 팔찌의 진짜 의미를 의심하지 않는다. 유명 연예인과 권위 있는 사람들이 착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플라스틱 팔찌를 차고 다니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팔찌는 집중력, 면역력 강화, 원적외선 방출 등의 새로운 효능이 추가되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유명인을 따라하는 건 21세기의 전염병이 되어버린 걸까?
그러던 어느 날 여중생 혜지에게 새디스트 스토커가 생겼다. 체벌카페 회원인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혜지에게 영상통화로 털복숭이 다리를 보이며 자신의 노예가 되라고 협박한다. 군인 아버지를 둔 평범한 30대 직장인인 그를 제압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스토커가 짝사랑하는 회사 신입사원 미니홈피에 그의 아이디로 들어가 지켜보고 있다 는 댓글 달기.
모든 정보를 인터넷으로 수집할 수 있는 시대에서는 취미 생활도 무한히 다양해진다. 오프라인에서 드러내놓고 활동하기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취미들도 그 안에서는 존중받는다. 정크 푸드 마니아, 프라 모델 마니아,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들이 모인 SM 카페까지. 이 소설에는 유독 마니아가 많이 등장한다. 혜지의 스토커 또한 체벌카페의 회원이었다. 군인 아버지, 엄한 선생님 밑에서 맞고 자란 30대 남성 스토커는 때리고 싶어 하고, 아무리 대들어도 뺨 한 번 잘못 때리면 종일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시대에서 매 맞지 않고 자란 10대 여중생은 맞고 싶어 한다. 체벌카페 회원들은 이것을 니즈needs와 원츠wants가 완벽히 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20세기 소년》은 한때는 ‘마니아’였고 지금은 일명 ‘덕후’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그들을 통해 삐뚤어진 ‘니즈’와 ‘원츠’가 제한 없이 통용되는 21세기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데, 이런 장면들이 조금은 불편하면서도 통쾌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두 기억을 가지고 사는 마지막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와 20세기 소년 사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종종 미래의 모습을 그려왔다. 소녀들이 미래를 상상하며 ‘나중에는 전화기로 얼굴 보고 통화하고, tv도 볼 수 있대!’라고 통화하는 영화 ‘써니’의 한 장면처럼. 이 소설은 써니의 시대에 살던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상 통화가 가능하고 전기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21세기가 되었지만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세상. 이 지점에서 20세기소년이 탄생했다.
해질 때까지 흙장난을 하다가 저녁 무렵 친구들과 아쉬운 인사를 한 어린 시절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자투리 시간이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세대. 《20세기 소년》의 주인공 나와 호제, 토미는 두 기억을 가지고 사는 마지막 세대다. ‘청계천’, ‘서울’ 등이 한글로 선명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만드는 나의 사업은 부도가 나고, 해외 구매를 대행해주는 호제는 넘쳐나는 돈을 감당하지 못한다. 새롭게 창조하는 것보다 중간에서 유통하는 사업이 더 돈을 잘 버는 21세기. 더 잘 살겠다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토미는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주변인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모두 ‘21세기는 우릴 배신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중생 혜지는 미래를 상상하기 이전에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때에 태어났다. 일명 마우스를 쥐고 태어난 세대. 궁금한 것은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취미도 친구도 온라인에서 찾는 게 더 편하다. 일찍부터 인생이 재미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억지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음란체벌카페의 주인장이 되었다. 더 큰 자극을 원하는 21세기의 아이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마조히스트라구요. 내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든 기쁨을 느끼려면 반드시 불행해져야 하는 법이죠.”-83쪽
《20세기 소년》은 발상의 참신함과 소설의 결말까지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서사 능력은 물론, 미디어 와 시간 과 세대 를 둘러싼 문제의식의 날카로움과 사회적 상상력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스트레이트한 펑크록같은 소설을 지향했다는 박형근 작가의 말처럼 문장의 리듬감이 뛰어나고, 눈을 뗄 수 없는 빠른 전개가 특징이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외모 중심의 세상을 날카로운 상상력으로 비트는 박형근의《20세기 소년》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되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