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
죽은 자의 땅을 파는 남자와 금박 장식을 비단에 새기는 여인
끝내 치명적인 독이 되어버린 기이한 숙명
악의 본성을 해부한 조선 의학 서스펜스
“죽음이란, 누군가에게 그림자를 맡기는 거라고.
그걸 탁영이라 한다고…”
조선 후기, 한양. 시체를 묻으며 살아온 천민 백섬은 누이 막단의 기일에 들른 훈룡사에서 목을 맨 도령을 목격한 뒤 뜻밖에도 조선의 어의 최승렬 댁 노비로 팔려간다. 외딴 별채 구곡재로 보내진 백섬은 종치고는 이상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약재 배달을 온 금박장 희제, 매를 찾으러 온 장헌과 은밀한 벗이 된다. 하지만 그 호의에는 끔찍한 이유가 숨겨져 있었음이 드러난다. 여기에 얽히고설킨 인물들 사이 펼쳐지는, 우정과 연모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처절한 복수가 시작된다!
조선 왕실을 뒤흔든 독살 미스터리,
뒤틀린 사랑과 처절한 복수로 말미암은 끔찍한 결말
『탁영』은 당쟁에서 비롯된 단순한 독살이 아닌, 삼사(혜민서, 전의감, 내의원)를 통솔하는 수어의首御醫가 왕족과 동일 사주인 천민을 임상실험체 삼아 비밀리에 타국의 맹독을 연구한다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 결괏값을 활용하여 위중한 병증을 만들어내고 기막힌 의술을 행하는 듯 치료를 반복하며 대대로 왕실을 쥐락펴락 길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구중궁궐에서 암투를 벌이는 수어의가 아닌, 세자와 한날한시에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가혹한 운명에 처한 매골자埋骨者, 백섬의 시선을 따라간다.
“전 이제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요. 소중한 걸 굳이 곁에 두려고도, 행복해지려고 애쓰지도 않으려고요. 그냥 자드락길에 핀 망초마냥 흔들리면서 서 있으려고요. 오늘도, 내일도 그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만을 바라면서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살려고요.” (p. 326)
평생 음지에서 시체 묻는 일을 했으나 각양각색의 압화를 만드는 순수의 결정체 백섬과 온 세상과 맞설 듯 당당함을 가진 여인, 희제. 이 두 사람의 우정과 핏빛으로 얼룩지는 연모, 거기에 희제를 갖기 위해 의관의 양심마저 저버리며 악을 자처하는 장헌과 과거에 발목이 잡혀 첫 설렘 앞에서 좌절하는 칼두령의 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각각 잔인하고, 투박하며 또 처연하게 어긋나는 우정의 생로병사가 펼쳐진다. 동시에 수어의 최승렬과 그의 아들이며 세자의 전담의관인 장헌이 의학 드라마적 흥미를 더한다. 그 외에도 역병의 시체를 묻는 매골승埋骨僧, 이마를 땅에 대어 대신 절하는 상비顙婢, 나라에서 고용하는 맹인 악사인 현맹絃盲 등 생소한 조선의 업들도 소개된다. 그 이면엔 부유한 상인이 득세하고 엄혹한 박해에도 천주교가 번성하는 등 자본주의와 인본주의에 눈뜨는 조선 후기가 생생하게 재현되고, 중인인 의관 집안에서 정승이 배출되고, 인간 취급 못 받던 백정이 상인으로 성공하는가 하면, 양반집 규수가 천노의 업인 금박장을 자처하는 등 신분이 붕괴되고 뒤섞이는 사회상도 조명된다.
“비밀까진 아닌데…… 난 매골자라고 소금을 맞기 일쑤였어. 영가들이 내 어깨에 매달렸다고, 재수 없다고 면전에 침을 뱉는 사람도 숱하게 많았어. 몸에 항상 시취가 배어 있었고 엄동엔 땅이 얼어서 시체 더미에 불을 지르는 게 예사니 시체 태운 누린내가 배었고. 일이 많아 씻을 수도 없는 날엔 밭뙈기 한쪽에 있는 두엄 더미 속에서 잠을 잤어. 시취가 아니라 거름 냄새가 나면 기껏 머슴으로 보일 테니까. 그러면 진휼청에 가서 풀죽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을 수가 있었으니까.”
말의 무게가 희제를 짓눌렀다. 상상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 비밀이었다. 희제는 기껏해야 어느 댁 누구와 몰래 서신을 교환했다든지, 부모님 몰래 밤마실을 다녀왔다든지 하는 정도의 비밀을 들어봤을 뿐이었다. 한데 백섬의 것은 중량이 달랐다. 먹먹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꽃을 띄워 목욕을 한다 했던 것은 이런 곡절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구나……. 정작 담담하게 비밀을 말하는 백섬의 눈빛은 뾰족한 가시밭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영롱하였다. 그의 머리 위로 어룽어룽 해그늘이 쏟아져 내렸다. (p. 51)
***
이재욱, 조보아 주연 넷플릭스 시리즈 <탄금> 원작 『탄금-금을 삼키다』와
현재 TV시리즈로 제작 중인 『이날치, 파란만장』에 이은
장다혜 작가의 신작, 조선 미스터리 메디컬 서스펜스 『탁영』
“정말 제가 벽사라고요?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이다! 니 맞다! 팥죽 뿌리고 소금 치는 것보다 천배 만배 강력한 인간 부적! 그니까 아홉 번 꺾어지야 들어올 수 있는 구곡재에 고이 모셔놓고 으르신이 직접 근강까지 살피시는 거 아이가. 근데 부적이 막 바깥으로 나돌믄 되긋나 안 되긋나? 온갖 때만 인간들한테 부대끼믄 부정이 타긋나 안 타긋나?” (본문 p. 104)
“너, 남 얘긴 전혀 안 듣는 못된 버릇 있어. 알아? 나 이 얘기, 너한테 열 번은 더 한 것 같은데? 나 정인 따위 필요 없어. 네가 임금, 아니 하늘님이 돼도 난 혼인이니 뭐니 그딴 거 안 해!”
“기다릴게. 네가 나랑, 그딴 거 한번 해보고 싶어질 때까지.”
“잘해야 기껏 갑자 넘기는 게 인생이야. 그것마저 언제 어디서 반 토막 날지 모르는 거고. 내 어미, 내 오라비! 너도 봤잖아. 난 누군가의 무엇 같은 건 안 될 거라니까? 철딱서니 없이 그냥, 윤희제로 살다 죽을 거라고!” (본문 p. 122)
“의관으로서 신념만 저버린 게 아니라, 아예 인간이길 포기했구나?”
“구계며 매새끼며! 그건 그저 의술을 위한 도구일 뿐이야! 난 첨단 의술을 행하는 의관이고!”
정의라고 착각할 때 인간은 가장 잔인해지는 법이다. 작금 장헌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했다. 희제는 이따위 인간 말종과 제가 한때 벗이랍시고 말을 섞었던 것이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의관 좋아하시네! 넌 그저 목숨으로 장난이나 치는 악귀야! 인간의 도리조차 모르는 개망나니라고! 그 정도면 광증이야! 너 미쳤다구!” (p. 210)
[주요 인물 소개]
윤희제(여/18세) “누구 그늘 밑, 난 싫다니까!”
금박장이자 전 역관의 외동딸. 남녀 간의 우정을 믿고 사내 벗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상여인. 어미와 오라비의 죽음으로 삶의 덧없음을 일찍 깨닫고 절대 누군가의 무엇 따윈 되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백섬의 등장으로 그 철석같은 다짐에 금이 가지 시작한다.
백섬(남/18세) “이 밤만은 금와당의 부적이면 좋겠다.”
세상 가장 탁한 곳에서 매골자로 살았으나 마음에 한 점 그늘도 없는 순수의 결정체. 그 무엇도 가진 적 없기에 결핍조차 없고 욕망조차 않지만 희제의 비밀을 나누고 벗이 된 후 처음으로 운명을 거스르고 미래를 꿈꾼다.
최장헌(남/18세) “그물로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라면 작살로 꿰는 수밖에!”
어의 최승렬의 차남으로 청나라 유학까지 다녀온 수재. 아비의 뒤를 이어 조선 최고 어의가 되는 것은 그저 당연한 것이라서 우정으로 가장된 초련, 희제를 갖기 위해 맹렬히 돌진한다.
칼두령(남/19세) “평범하게 사는 건 이미 글렀으니 멋지게라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백정 태생의 칼패 두목. 무식한 왈패를 ‘싸울아비 대여업’으로 탈바꿈시킨 입지전적 인물. 칼질이 업이나 연심만은 끝내 베어내지 못한다.
최승렬(남/50대)
삼사를 모두 통솔하는 수어의. 차남 장헌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쓴다.
복순 어멈(여/50대)
장헌의 유모.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얼금뱅이 골초.
개영(남/40대)
최승렬의 싸울아비. 상명에 무조건 복종하는 충실한 심복.
윤병찬(남/40대)
전 역관이자 희제의 아비. 아들의 요절 후 금맥을 찾기 위해 조선팔도를 떠돈다.
세자, 윤(남/18세)
두 형님의 병사로 얼떨결에 세자로 책봉된 셋째 대군. 역시 대물림된 병증으로 본분을 다하지 못한 지 오래다.
방호(남/18세)
세자의 호위무사이자 죽마고우. 익위로 입궐하며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낸 충신.
최남헌(남/20세)
최승렬의 장남이자 장헌의 형. 의금부 도사.
일천(남/50대)
천하제일 관상가이자 역술가. ‘현 세자가 왕이 되지 못한다’ 직언하여 관상감에서 퇴출되었다.
괴강(남/40대)
땡중 매골승. 백섬과 막단을 거두어 길렀다.
막단(여/20세)
백섬의 벙어리 누이. 절에서 여종 노릇을 하다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