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격이지만 무쓸모는 되기 싫어.
<각성><br /><br />또래보다 약하게 태어난 아이는 <br />집보다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br />번잡한 대학병원 대기실이, 진료실이 놀이 공간이었고, <br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이 엄마와 아빠 다음으로 태어나 <br />제일 자주 본 사람들이었다. <br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마주한 남편과 난, 어쩔 수 없이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br /><br />언젠가 아이의 면역력이 나아지면, 다시 사회로 나가겠노라 다짐하며 힘든 시간을 견뎠다. <br />아이 엄마로만 남을 인생이 두렵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br />날 필요로 하는 사회가 필시 존재할 거라 믿었다.<br /> <br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막연한 상황의 연속으로 불안감만 커졌다. 엄마라는 왕관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었고, <br />그럴 때마다 육퇴 후 갖는 일탈 성 알코올이 간절했다. <br />그런데 신의 장난인지 남편과 함께 마신 맥주가 사랑의 묘약으로 둔갑한 탓에 물은 엎어졌고, <br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었다. <br /><br />하나만 낳아 잘 키우려 했건만, <br />내 나이 서른둘에 그렇게 ‘딸 연년생 엄마’ 가 되었다. 더불어 사회로 나가려 했던 계획은 결국 저 멀리 둔 채, 잊혀 갈 수밖에 없었다.<br /><br />한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 다짐했었기에 스스로가 더욱 원망스러웠다.<br />아들만 잔뜩인 집에서 고명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랐을 엄마가 억척스럽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희생을 치러야 했을까 생각하면 안쓰러움이 앞서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 길이 싫었다.<br /><br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br /><br />엄마도 한때는 나처럼 꿈 많은 소녀였겠지. <br />나는 그 소녀의 꿈을 갉아먹으며 자랐기에 <br />더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br /><br />하지만 소녀의 꿈을 갉아먹고 자란 소녀는 꿈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br /><br />아이 둘을 안고, 업고 나가면 지나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이런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br /><br />"아이고.. 엄마가 힘들겠네~"<br />"연년생인가 봐~ 쌍둥이보다 힘들다던데..." <br /><br />모두의 우려 속에서도 나는, 힘들다는 연년생 육아를 단 하루도,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 역할에 빈틈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등바등할수록 내가 세상에, 그리고 사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때때로 서글펐다. <br /><br />그러다 문득, 서글프다고 마냥 주저앉기에는 <br />젊음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br />과거의 선택에 후회만 하며 세월을 보내기에는 <br />내가 너무 아까운 것 같았다. <br /><br />그래서 <br />용기 내어 다시 꿈꾸기로 했다. <br /><br />비록 소녀에서 아줌마가 된 지금이라 할지라도. <br />비록 10년의 경력 단절로 자격이 전무한 경단녀라 할지라도.<br /><br />일단 부딪혀 보는 거다. <br />죽기 살기로. <br /><br />‘날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