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실리어의 왕 레온티즈와 보히미어의 왕 폴릭시니즈는 아주 우정이 돈독한 죽마고우다. 폴릭시니즈가 레온티즈의 청으로 시실리어에 한동안 머물다 귀국하려 하자 헤어짐을 아쉬워한 레온티즈는 더 머물 것을 부탁하나 거절당하고, 대신 아름다운 왕비 허마이어니를 시켜 폴릭시니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레온티즈는 자신의 부탁은 거절하고 아내의 요청은 받아들이는 친구 폴릭시니즈와 왕비 사이를 급기야는 의심하여 광적인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레온티즈는 폴릭시니즈의 독살을 명령하나 그는 다행히 캐밀로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도주하고, 감옥에 갇힌 왕비는 옥중에서 딸 퍼디타를 출산하는데 남편은 그 딸을 불륜의 결과라 단정하고 황막한 들판에 내다버리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린다. 한편 마밀리어스 왕자가 어머니의 불행을 염려한 나머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비보를 접한 허마이어니 역시 절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폴로 신의 신탁이 알려지고 모든 비극이 자신의 질투와 망상 탓임을 알게 된 레온티즈는 폴라이나의 도움을 받아 뼈아픈 참회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16년 후, 양치기의 손에 양육된 퍼디타는 비록 비천한 가정에서 성장했으나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을 갖춘 여인으로 나타나 보히미어의 왕자 플로리젤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저자소개
셰익스피어, 그의 남아 있는 기록, 남아 있지 않은 기록누가 뭐라든,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세계 최고의 극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쓴 37편의 드라마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어 TV, 영화,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고, 챨스 램 남매가 각색한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을 포함, 독자에 따라 그 내용과 수준을 달리하는 책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고 있는 실정이어서, 그의 드라마 중 몇 편의 내용은 세계각국의 남녀노소에게 진부하리만치 친숙하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틋한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그러나 정작 셰익스피어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자신을 둘러싼 당대 문제들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말해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근대 탄생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격변기를 살았던 그가, 자신을 휘감고 도도히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알아낼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의 삶에 대한 단서가 될 최초의 기록은 1564년 4월 26일의 세례 기록이다. 영국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소읍 스트래트포트 온 에이븐에 있는 성삼위일체 교회는, 존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난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564년 4월 26일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가 마을의 읍장을 지낼 정도의 유지였으므로 셰익스피어는 상당히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며 {W:그 마을의 문법학교}를 다녔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결혼에 관한 것. 1582년 11월 27일 당시 18세였던 셰익스피어는 자신보다 8년 연상이었던 앤 헤서웨이와의 결혼허가서를 발부받았는데, 세 번의 결혼예고 후에야 결혼이 이루어지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급하게 허가서를 발부받았다는 사실과 신부와 신랑의 나이차이가 많이 나며 이들 부부의 첫딸 수잔나가 결혼 후 6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런던에서 활동한 십수년 간 두 사람이 떨어져 살았다는 사실 등, 그의 결혼 생활은 후대인들의 온갖 상상의 근원이 되었다. 이들 부부는 2년 후 햄넷과 주디스라는 쌍둥이 남매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배우 겸 극작가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1592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극장의 시인, 셰익스피어1592년 9월, 극작가였던 로버트 그린이 사망한 직후, 그가 임종 침상에서 탈고한 자서전격의 유작이 출판되었다. 그 팜플렛에서 그린은 셰익스피어를 {W:벼락출세한 까마귀}에 비유하면서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풋내기 배우요 극작가인 셰익스피어가 영국의 연극계를 뒤흔드는 것에 심한 질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글은 1592년에 이미 셰익스피어가 배우로서, 극작가로서 확고부동한 자리에 올랐음을 증명해준다.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서 확실한 성공을 거둔 후에도 배우활동을 계속했는데, 1608년 기록에도 여전히 출연배우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1594년 챔벌린 극단에 입단한 그는 일 년에도 여러 편씩, 놀라운 언어구사력과 탄탄한 플롯을 바탕으로 각양각색의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 등장하는 극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서의 명성과 부와 인기를 한몸에 누리게 된다. 1589년 《헨리6세》를 시작으로 1611년 《태풍》에 이르기까지 그는 총 37편의 극을 남겼다. 1613년 플렛처와 공동 집필한 《나의 두 귀족 친척》을 끝으로, 그는 극작가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고향인 스트래트포드로 돌아가 편안한 말년을 보냈으며, 1616년 4월 23일 생을 마감하였다.'영원한' 셰익스피어, 격변기의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가 살았고 작품 속에 그려낸 시대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도입으로 근대가 태동하던 대변혁기였다. 그 시대에 두 힘의 충돌과 그 갈등을 축으로 하는 드라마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성행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몇백 년을 이어오던 질서가 스러지고 전혀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에,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하층계급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층이 함께 극장에 드나들며 무대에서 벌어지는 '역사'를 보고 그 역사의 형성에 참여했다. 셰익스피어는 근대로 이행하는 역사적 흐름의 필연성을 짚어내고 그 질곡과 모순의 단초들을 예리하게 지적해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셰익스피어 사후에 동료 배우들과 인쇄업자들의 기억을 근거로 출간한 것이다. 박제된 진리로서가 아니라 '열린' 창작물로서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하는 부분이다.